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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이미경의 블로그 입니다
눈물/이미경 사위는 붉은 해가 노을을 엷게 깔고 있는 시간, 초인종을 누른다. 긴 울림만이 되돌아오는걸 보니 아이들은 학원에 가고 남편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나보다. 외투를 벗어놓고 주방으로 향한다. 데운 국과 밥 한 공기, 몇 가지의 반찬을 꺼내 놓고 수저를 들 때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진다. ..
장수풍뎅이의 죽음/이미경 풍뎅이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큰 몸집이었다. 머리에 뿔돌기가 있는 투구를 쓴 모습이 듬직해 보였다. 흑갈색의 몸체에서는 고향집 볕 내리는 고운 마루의 윤기가 흘렀다. 그 윤기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아이가 곤충을 키워 보겠다며 풍뎅이를 사 들고 왔을 때 그리 ..
향기/이미경 자주 눈길이 하늘로 향한다. 아침나절 받은 친구의 전화 때문이었다. 새로 개발한 주막이 있으니 눈이 내리면 나오라는 말을 했다. 친구는 음식 맛이 좋고 값도 싼 집을 찾을 때마다 개발이라는 말을 쓴다. 사람들이 좋아서, 분위가 좋아서, 가끔씩 술자리에 같이 있기는 하지..
외출/이미경 수녀님을 뵙는 순간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곳이 세속과 떨어져 바깥출입을 금하고 기도와 노동 속에서 극기한다는 관상수도회라는 건 알고 왔지만 수녀님이 철창 안에 계실 줄은 몰랐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습관처럼 충실했던 삶에 회의가 왔다. 하루 종일..
섬 /이미경 여자가 울고 있다. 친숙하고도 낯선 여자가 어눌한 말투로 무슨 말인가를 하며 울고 있다. 여자는 몸의 왼쪽이 마비되어있다. 여자가 몸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외출하기 위해 화장을 하고 있을 때였다. 눈썹을 그리고 립스틱을 바르려는데 갑자기 팔다리에 힘이 빠지며 목이..
울타리 이미경 봄부터 내 눈길을 끈 것은 사각 울타리였다. 누군가 아파트 꽃밭 한 쪽 모퉁이에 단단한 나무를 직사각형으로 박고 눈에 잘 띄는 붉은색 나일론 끈으로 둘러 작은 꽃밭을 만들어 놓았다. 야무지게 갈무리한 것이 눈에 거슬렸으나 어떤 귀한 것을 심어 놓은 것만 같아서 그 앞을 지날 때 ..
번뇌/이미경 꿈을 꾼 듯하다. 남자가 가지런히 개어두고 간 목도리와 장갑, 분명 꿈은 아니었다. 입춘이 지났다고는 하나 아직 바람이 차다. 젖은 머리가 마르기도 전에 새벽길로 내몰린 남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면부지인 남자가 내 마음에 괴로움 한 자락을 내려놓고 간걸 보면 남자는 전생에 ..